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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노트

나의 작업실에는 참나무와 호두나무, 물푸레나무와 박달나무, 산벚나무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나는 그중에 유난히 호두나무를 좋아한다. 호두나무에는 오묘하고도 매력이 넘치는 갈색과 보라색, 그리고 회색이 보이기도 하고, 은은한 푸른색이 느껴지는 등 다양한 색깔의 감흥을 느낄 수 있다.
 
호두나무에서 느껴지는 이 다양한 색상들은 내 인생의 굴곡진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도시의 삶은 위기의 회색 빛처럼 어두웠었고, 첩첩산중 깊은 산골짜기의 삶은 갈색과 보라색을 섞어 놓은 듯 혼탁 했었다. 하지만 가끔이었지만 희망의 푸른색처럼 기쁜 날도 있었는데 바로 나무와 접한 날들이었다.
 
나는 나무를 만지며 비로소 나무 심는 법과 나무를 키우는 법을 배웠고, 나무를 깎고 다듬으며 나무의 아픔과 인생의 아픔도 함께 배우기도 했다. 내게 나무는 지나온 인생을 기록한 시간이며, 아픔의 시간이기도 하며, 내 삶을 이겨내기 위한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무는 나의 존재를 표시할 수 있는 소중한 매개체이다. 그러나 어느 날, 나무에 물고기를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더 이상 나무 깎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려진 곳에는 나무의 파편들이 생기 가득한 물고기가 되어 화면을 뛰어나올 듯 펄떡거리며 힘차게 유영하는 물고기들의 군무(群舞)가 보였다. 그날, 나는 나무와 물고기의 향연에 취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나무 본연의 모습에서 물고기를 만들기 위해 인위적인 담금질이나 억지스러운 모양으로 나무를 깍지 않는다. 나무가 생긴 그대로, 있는 모양 그대로, 나무 본연의 모습 그대로 화폭에서 노니는 나무 물고기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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