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이면에 존재하는 것
장루이 쁘아뜨뱅(미술평론가, 파리8대학 교수)
세계의 기묘함
김명수의 최근 작업은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아니면 우리에게 기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우선 이 놀라움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우리의 눈은 그의 작품을 그림으로도 사진으로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들이 단순히 복사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예술을 모종의 가치를 지닌 형태와 암암리에 결부시키는데 익숙한 우리의 정신은 처음부터 그 확실성 속에서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김명수의 경우, 매혹적인 어떠한 시도도 찾아볼 수 없지만, 그러나 이 점이 그의 고유한 의미를 강화해준다. 분명 복사물에 대한 의존은 예술가로서의 하나의 입장의 선택으로 보인다. 이러한 입장의 선택은 오늘날의 예술의 가치에 대한 일반적인 하락을 말하자면 여기서는 예술적 현상 자체와 그 결과로 비롯된 이미지의 가치를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산업화와 함께 탄생한 복제의 무한한 가능성은 급격할 정도로 그 위상을 변모시켰다. 유명한 저작 <기술적인 복제 가능성 시대의 예술품 속에서 이러한 현상을 가장 깊이 꿰뚫어 보았던 사람은 아마도 독일의 사상가 월터 벤자민이었을 것이다. 그 저작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분명히 읽어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복제 기술이 재현된 오브제를 전통의 영역으로부터 분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복제품을 양산하면서 복제 기술은 단 한 번의 제작을 대량생산의 현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복제 기술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재생된 오브제가 시각적으로 혹은 청각적으로 제공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그 오브제에 하나의 현실성을 부여한다. "예술이란 바로 그러한 진실의 격렬성을 은폐할 수도 없고, 또 은폐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김명수는 무수한 이미지의 재생산이라는 현상 그 자체와의 직접적인 대면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인쇄물에서 취한 이미지들로부터 제작된 이 복사물들은 우리에게 메마르고 광활한 대지의 경치를 보여준다. 거기에서 인간은 세계 - 우리가 이미지의 무한한 증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 를 앞에 두고 느끼는 기묘함의 감정을 심화시켜 가면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미지 중심부의 기묘한 부재
김명수가 이 복사물들 위에 요컨대 일종의 돌이나 구름과 흡사한 하나의 형 대 혹은 다수의 형태를 그려가면서 작품을 제작하는 것은 바로 이렇듯 끔찍한 증식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다. 구름 모양의 돌은 이미지가 우리의 시선에 제공하는 이 공간 가운데, 어딘가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 그는 변형된 이미지를 여러 번 재현한 다음, 구름 형상의 돌을 하얀색으로 가볍게 칠한다. 그 후부터 구름 형상의 돌은 기이한 유령들처럼 항상 그 경치를 떠나지 않는다. 거기에서 중앙부 어디에도 놓여있지 않은 이 형태들은 이해하기 힘든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이러한 부재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 부재 속에서 그토록 자주 재생산된 이미지가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이다.
김명수가 제시한 이미지가 독창적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작업을 통해 다시 손질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보다는 오히려 그가 제시한 이미지가 나름대로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 이유는
그 이미지가 재현된 이미지 전체에 결여되어 있는 어떤 것을 정확하고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월터 벤자민은 다음과 같이 확인하곤 했다. "가장 완벽한 재현에는 무엇인가가 빠져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 예술작품이 존재하는 장소에서의 실존의 유일성이다." 그러나 <여기>라는 장소와 <지금>이라는 시간은 더 이상 우리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는 더 이상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적인 실존으로부터 축출되었고 김명수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림에도 몇몇 방식을 통해서 이러한 실존의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를 현혹하는 수많은 현대 예술가들과는 달리, 김명수는 그러한 실존을 추구하지 않는다.
실존의 재발명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명수는 우리에게 낯설고도 예기치 않은 하나의 통로를 제시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구름처럼 가벼운 이 돌을 보라.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거나 보여주고자 한다. 이 정사각형 형태의 불가사의한 실존에 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 보라. 그 형태는 아이들 놀이로부터 취한 접혀진 종이, 즉 <딱지>로부터 나온 것이다. 어떠한 것과도 연결되지 않는 둥둥 떠 있는 듯한 이 형태들은 아무것도 어느 장소도 공간의 정확한 어느 지점도 가리키지 않는다. 요컨대 그 형태들은 공간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명수에 의해 시각화된 형태들은 재현된 이미지 전체에 작용하는 이러한 결핍의 표시가 된다. 불가시적인 것의 기본적 구현인 그의 형태들은 따라서 가시적인 것을 불가시적인 것과 별로 연결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그 형태들은 그것들이 이미지 전체의 이면을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 한 스스로 보여지지 않는다. 어떠한 것과도 연결되지 않는 이 흰색이 무엇인가를 구현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미지만큼이나 현실을 결코 떠나지 않는 내재성 자체일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이면에서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흰색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미지의 이면에서 진동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공백인 것이다. 그리고 이 형태는 불가시적인 것도 아니고 빛이 없는 동굴의 어두운 세계도 아닌 그의 부재 외에는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될 때 실존이 지니는 형태를 의미한다. 이 구름 형상의 높은 우리들처럼 살아있는 사람들 끊임없이 재현된 이미지들을 스크린을 통하지 않고서는 세계와 일치시킬 수 없었던 의 뇌리에서 결코 떠나지 않는 실존의 묘지인 셈이다. 딱지의 접혀진 형태는 텅 비어있는 하늘로 올라가는 어느 친근한 사원의 치밀한 완성을 가리킨다. 그 사원은 이 떠도는 듯한 형태들을 유혹해서 사로잡고 결국에는 그것들을 순화시키는 은밀한 힘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김명수의 작품이 의도하는 바는 실존의 진실에 도달하는 길이 마음의 눈으로 이러한 형태를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도록 해준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구현하는 부재의 표시를 다시 끄집어내어 우리에게 펼쳐 보일 뿐만 아니라 가장 귀중한 행복과도 같은 실존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되살려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