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신디정 평론: 근작을 중심으로
침묵 속 발화하는 존재의 의미
_실존의 터전에서 현현되는 것들
홍경한(미술평론가)
그리움이란 이름의 사랑 한 조각
‘그리움’이란 부재에 대한 갈망이자 아쉬움이며, 상실했거나 도달할 수 없는 무언가 또는 누군가에 대한 강한 욕망내지는 동경을 의미한다. 슬픔과 절망감을 심어주고 기억을 환류 시키는 애달픈 감정이다. 그렇지만 그리움은 사랑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의 파편이 모여 그리움의 크기를 만들고 그 크기만큼 그리움을 품게 한 이의 자리도 커지는 것, 결국 사랑 없이는 그리움도 없다.
이와 관련해 필자가 자주 인용하는 글이 있다. 바로 작가 신경숙의 『아름다운 그늘』(1995)이다. 그는 해당 산문집에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끈질기게 우리들의 내부에 사랑이 숨어 살고 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아이였을 적이나, 사춘기였을 때나, 장년이었을 때나 존재의 가장 깊숙한 곳을 관통해 지나간 이름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작가 신디정(CINDYJUNG)의 몇몇 시리즈 작업 제목은 <사랑>이다. 신체 속 일렁이는 색과 선, 종교 도상처럼 환하게 빛나는 인체가 오묘한 기하학적 배경 아래 서 있는 그림들이다. 이 작업에선 사랑의 감정이란 환희와 거리가 멀다. 뭔가 공유된 경험의 단절은 낯설고, 손이 닿지 않는 이름이 사랑이었음을 깨달았을 때의 여운이 가득하다. 침묵과 역동이 교차하는 겉과 달리 흡사 느직하다 여기는 순간에서야 밀려오는 후회를 감당하며 슬픔에 빠진 채 끝없는 시간을 버티는 것 외에는 할 게 없다는 듯한 느낌을 전달한다.
예술가들은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스스로 잊는 법을 찾아 헤매며 미처 다 부르지 못한 이름을 무언가에 새긴다. 죽음도 그렇다. 현실에서의 죽음은 지독한 욱신거림이자, 끝이지만 예술가에 의해 어떤 매체에 도달할 때 비로소 진정한 죽음을 맞는다. 죽음이 죽는다는 것, 그건 부활하여 영원한 안식에 들어섬을 뜻한다.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작업한 신디정의 <MISS> 작업도 그렇다. 2016년 이후 지속적으로 이어져온 이 연작은 “명상을 통한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들며 나에게 전해지는 에너지를 담은 작업”이다. “작업을 하면서 더욱 깊은 명상에 빠지게 되는데 그때 일어나는 차
크라(Chakra)의 에너지가 화폭에 그려진 것.”이다.
명상의 근원은 조용한 성품과 관련이 있다. 존재의식을 탐구해온 미적 태도와도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근작들은 부친의 작고에 따른 개인적 아픔과 발병 및 치유의 파편들이 알알이 박힌 결과이기도 하다. 즉, 붉거나 푸른, 색깔 명료한 작품들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는 부친과의 연을 담은 시간의 채록이면서 심적 내재율을 극대화하는 명상을 통한 정좌와 또 다 같은 글른 세상에 대한 탐미, 평화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근작에선 최근 몇 년 간 지난하고 고통스러웠던 부재의 장면들과 마주하고, 좌절하거나 일어섬의 과정, 마음을 다잡고 떠나보냄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기억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요동친다. 육신의 고통에서 해방된 채 진정한 평화로움을 옮기려 한 정적과 평정의
결과물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차크라(Chakra), 우주적 시간관(時間觀)을 담다
정적과 평정의 결과는 존재론적 시각에서 비롯된다.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제작된<MISS> 시리즈에 자주 등장하는 원형은 관조적 태도와 우주적 시각을 유지해온 시간관(時間觀)을 지닌 눈으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없는 균질적이고 직선적인 서양에서의 불
가역성(不可逆性)의 성질이 아닌, 동양의 60갑자, 불교의 윤회설, 만다라 등에서도 보이는 ‘원(圓) 순환적’ 성격을 내포한다. 그림 배경마다 기하학적·규칙적으로 자리한 도형은 작가 작업이 염원(念願)과 바램에 대한 일정한 정신성을 갖는 초월적 장소임을 가리킨다.
그중에서도 감춰진 듯 묘하게 솟는 기하학적 패턴들은 욕망하는 인간의 체취, 복잡한 인간 심리를 제한하는 요소에 대한 반등으로서의 양식임을 보여주고, 붉고 생생한 색채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관능적 감각세계는 이상미와 자유롭게 엮인 존재의 문제를 대리하는 조형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렇듯 그에게 실존은 부재를 더욱 극명하게 하지만 존재가 비로소 존재일 수 있도록 하는 주요 개념이다. <MISS> 연작의 핵심 또한 작가 내부에 존재하는 실존의 가치에 의미를 두어 왔다는 것이 옳다. 궁극적으론 자아와의 문제와 맞닿으며, 그의 작품 내부에 부유하는 카르마(Karma)는 거역할 수 없는 업(業), ‘나’를 중심으로 한 묵시적 세계임이 보다 강하게 휘몰아친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2016년에서의 존재는 마치 폭발하듯 빛이 산발한다. 나무와 화병 위에서 때론 구체적이고 간간이 추상적으로 불꽃마냥 피어난다. 인물도상도 이때 등장한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선 구체적 형상은 거세되고 완전한 추상으로 변모
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보기’가 아닌 ‘읽기’로의 전이다.
읽기로의 전이는 실존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이 인지하든 못하든 내가 존재하는 또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는 작가의 말에서처럼 세상의 수 없이 많은 우주들이 접근하면서 그의 작품의 틀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 우주의 내부엔 바다 속 고요함에 등치되는 평화와 진정한 사랑의 의미, 세상의 순리와 그에 반하는 부조리, 불의와 고통, 두려움 등이 복잡하고도 명료하게 배어 있다. 작가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죽음과 고독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죽음과 생명의 움틈, 자기치유적인 모습이 완만 하듯 뾰족하게 들어선 형국이다.
그런 점에서 공간의 확장성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근작들은 고통의 중량을 짊어지게 된 현실과 더불어 나와 타인의 고통에 관한 관대함, 삶의 무게를 분배하여 ‘타인의 짐을 덜고 상대방의 행복을 빌어주는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 고요함 속 진정한 평화를 찾기 위한 노력과 ‘기억’은 기명된 내용이 망각되지 않도록 하는 정신활동이다. 인간은 삶의 특정한 단면을 상기하고 호출하며 대체로 그 소환의 단초는 타인과의 교류 및 교감에서 발생한다.깨달음을 향한 내적 반작용도 발견할 수 있다. 넓게는 자신을 기록하는 이미지이자 삶의 반영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편으론 과거와 현재를 아우른 채 그리움과 사랑으로 빚은 대상과의 조우를 통한 실존(實存)과의 문제와도 맞닿는다.
특히 2022년 근작들은 타자의 시선에 멈춰진 이미지들의 향연이 아닌, 어디까지나 마음속 어딘가에 감춰져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창의적 조어이다. 실제로 작가는 예나 지금이나 예술의 가치란 형상을 포함한 다양한 회화적인 요소들을 포함한 부수적 가치로 정의되기 보단 그것이 본질을 이끄는 통로와 갈음되길 원한다고 말해 왔다. 필자의 시각에도 그의 그림에서 체감할 수 있는 또 하나는 작가 자신이 추구하는 내용에 대해 밀도 있게 연결해주는 소통의 다른 표현이다.
내가 존재하는 또 다른 우주
그에게 소통은 강압적인 주문이 아니다. 현실에 입각한 소통의 개념보다 신성한 공간으로 초월적 성격을 가진 일종의 길로써, 개인의 신화를 대입시키는 은유적 공간이자 추상적 형상과 내레이션을 지닌 장소다. 그래서일까, 최근 관심을 두고 있다는 카발라(Kabbalah)는 그냥 나타난 게 아님을 확인 할 수 있다.
작가는 이와 같은 소통과 임재를 작업 전반에 흩뿌려진 나지막한 호흡을 동반한 내레이션으로 삼아 고요 속 평화와 침묵의 발화와 화학반응을 일으킨 채 더욱 증폭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앞서도 언급햇듯)그는 이 침묵의 발화를 명상 으로부터 얻는다. 그것은 물질적 혹은 정신의학적 견지에서 정확하게 규명될 수 없는 인간 정신의 중심부를 의미하며, 추상적이고 여러 레이어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현존하는 것과 관념에 거처를 둔 실존의 터전에서 ‘현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그 현현의 시작을 7개의 차크라(Chakra) 중 첫 번째인 ‘뿌리차크라’(Root Chakra)에서 찾는다. 조형요소로만 보자면 ‘완전한 세계’ 또는 ‘치유능력을 가진 원’에 집중되지만, 작가는 이를 요가 전통의 7개 차크라 중 하나로 설명한다. 그는 “우리 몸속 보이지 않는 에
너지 센터를 깨우는 일”이라면서 “총7개의 차크라 중 5개(뿌리, 천골, 태양신경총, 가슴, 목)는 육체적인 것이며, 6번 제3의 눈과 7번 크라운 차크라는 영적인 영역이다.”고 덧붙인다. 차크라로 지정되든, 구체적 원의 역할과 의미로 정리하던 필자의 시각에 이는 모두 자기인식의 한 방법이다. 마음 챙김을 실천하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자신의 상황을 보다 깊게 지각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 가운데 명상은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초현실, 카발라의 사전적 정의는 ‘신’(神)을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대상으로 보고, 직접 그 ‘신’에 근접하거나 목전에서 봉사하는 것을 뜻한다.
“명상에 깊이 빠지다 보면 나의 그 어떤 의도도 무의미해 지고 끝없는 평온함에 다다르게 되는데 그 때 수많은 영혼과 만나게 되고, 그 안에서 그저 허용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픔, 고통, 슬픔, 기쁨, 행복 등…. 그 속에서 모든 감정들을 갈무리하며 고요를 찾는다. 그리고 에너지가 발산된다.”_작가 신디정(2018)
작가에 의하면 차크라의 순환이 원활할 때 건강한 명상이 가능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또한 차크라의 균형을 위한 방법으론 인간의 근본 상태이자 우주의 주제이기도 한 원형, 영적인 훈련으로 개발되는 제3의 눈인 차크라를 제외한 몸속 차크라를 육체적 운동으로 훈련하고, 치유능력이 강한 크리스탈,레이키,명상 등의 방법이 있다.이곳과 저곳이라는 두 차원 혹은 다차원을 연결해 새로운 차원을 생성하는 신디정 예술의 본질이다.
그의 포트폴리오를 보다 문득 작가에게 명상은 시간과 바퀴, 즉 영원한 시간의 수레바퀴인 윤원구족(輪圓具足)을 의미하고, 이는 낱낱의 살(輻)이 바퀴 측에 모여 둥근 수레바퀴(圓輪)를 이루는 인간 삶의 이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주 너머에 있을지도 모를 세계로 걸어가는 것, 스스로 잊게 하는 법을 찾도록 만드는 장치로서도 기능함을 깨닫는다.
멀리는 나를 존재토록 하는 힘으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과정이요, 내적 갈망을 해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감정적인 여정을 이완시키는 행위일 수도 있음을 본다.
특히 영적 전통에서 시행되는 명상은 정화를 도우며 시간 여행을 떠난 이와의 대화를 위한 그만의 의식과도 갈음된다. 다시 말해 근작에서 유독 진하게 느껴지는 명상은 이미 세상을 등진 영혼에게 영원을 선물하려는 작가의 박제된 의지라는 것이다. 그렇게 그의 기억에 존치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시 작품으로 재구성되어 특별한 존재로 귀결된다.
고요 속 평화, 침묵의 발화
오늘날 신디정의 작업에는 평화로움이 배어 있다. 인간의 정신성과 육체성, 그리고 우주의 공간성과 생성, 소멸, 미지와 같은 작가 자신만의 신화적인 요소들이 각각의 작품마다 만발하는 가운데 주요 축을 형성해온 평화로움은 간절함에서, 간절함은 진실함에서, 진실함은 진리를 통해 발화된다. 역으로 진리는 평화의 거푸집이다.
이를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진리란 존재자에 대해 부과되는 특질이다. 경험적 증거의 존재의 유무와는 상관없는 믿음을 넘어 영적 숭배로서의 신(神)이 자리하는 것도 이 순간이다. 그리고 명상은 그 신과 만나는 접점의 지대다.
작가 신디정은 매일 그 접점에 선다. 그에게 예술은 그 자체로 세상의 이치와 어떤 존재와 직접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매개이고, 사랑과 평화를 공고히 한 채 나눌 수 있는 무대다. 그리고 그의 그림 속 여러 이미지는 그 나눔의 건강함을 믿는 증표이자, 이젠 더 이상 가시적이지 않은 존재(들)에 실존이 다가설 수 있는 통로, 공유 가능한 복합적인 기호이다. 물론 그 스스로에겐 내면과 마주하는 통로이자 거울이며 존재성을 되새김토록 하는 매우 충실한 매체임에 분명하다.
흥미로운 건 ‘선함’의 ‘공유’다. 이는 전파력을 가지고 소소한 영향력을 지닌 의지의 유포와 맞닿는다. 선한 의지는 불신보다는 신뢰를,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기를, 상실보단 희망을, 슬픔보단 기쁨을, 절망보단 기대를, 상처보단 행복을 담아내려는 태도와 갈음된다.
그 태도 속에는 시대구분 없이 존재해온 인간의 고통과 방황, 악과 선, 신과 피조물의 관계 내에서 불안함을 영위해온 인간에 대한 치유가 놓여 있다. 또한 더욱 엄격해지고 단절되어 가는 동시대 불완전한 상황과 사람, 막을 수 없는 생과 사의 시간이 들어 있다.
이와 같은 요소들이 조형적이거나 미학적으로, 차크라를 통한 명상자체로 위치하는 것이 그의 작업의 실체다. 때문에 그의 여러 작품들에선 보이는 것 외, 보이지 않거나 드러나지 않은 측면을 살펴야 한다. 즉, 각각의 작품 고유의 표정에 감춰진 이면,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겹쳐진 조형에 드리워진 낯선 그림자들, 신체의 고통과 극복된 삶의 단면,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무언가를 갈급해하는 우리의 모습들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DREAM-STORY>를 주제로 한 2014년까지는 자유와 삶, 삶과 자유를 갈망하며 꿈과 같은 내 안의 것에 무게를 두었다면 이제 그의 작업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자체로 명상적 실천이 되며, 보는 사람에겐 진정된 고요함을 전달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그것은 나를 넘어 우리를 대상으로 한 보편적 성찰을 장려하며 과거 대비 작품에 보다 직접적으로 다가설 수 있도록 만든다.
작가는 그림을 통해 예술이란 단지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과 자신을 지탱할 수 있도록 해온 경험, 무의식의 표출임을 강조한다. 현실 밖의 세계, 시간 밖의 시간, 공간 외의 공간이 나와 함께 존재함을 말한다. 허나 그것은 언어로 규정된 것이 아니기에 파악은 쉽지 않다. 드러냄 자체로 언급되는 주어일 수 없다. 그렇기에 상상력은 증폭되고 사유의 여백은 확장된다.
그의 근작들은 삶과 존재로부터 느끼는 감정들, 생과 죽음 속에 뿌린 내린 고통과 절망, 그럼에도 애써 수거하여 산포하려는 사랑과 희망, 행복 등이 버무려진 시각과 정신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새롭게 혹은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갈구하는 것처럼, 채웠다고 믿는 것에 관한 파기의 불안감, 연속되길 기원하는 인간욕망, 타자로써 완성되는 실존에 관한 질문 또한 짙게 배어 있다.
흥미로운 건 2014년과 2016년이 다르고 2017년과 2023년의 작업 간 차이가 명료하다는 사실이다. 변화는 가시적이며 예전 대비 현재의 작업이 훨씬 질적 농도가 높다. 그에 발맞추듯 어디, 어느 곳에 서 있던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려는 부단한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더구나 한 방향으로 무리지어 어디론가 향하는 최근 작품들에선 시각을 지나 현존에 있어 작가의 시선이 감지될 뿐만 아니라 존재란 있고 없고의 차원이 아니라 이해의 범주임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그의 작품들을 접할 때 눈여겨봐야할 지점 또한 그것이다. 존재를 알아간다는 것, 삶의 중량이 버거워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할 순간이 도래할지라도 어쨌든 오늘은 일정한 나침반을 쥐고 걷고 있다는 것 말이다.
한편 신디정의 작품은 자신의 존재이유가 예술의 존재이유이고, 예술의 존재가 곧 자신의 존재임을 증명하는 도구다. 본질적으로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삶을 살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세상에서 우리의 목적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고 존재의 의미는 우리가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혹자는 우리의 존재가 신성한 계획의 일부라는 종교적 믿음의 형태를 띨 수도 있고, 우리 모두가 노력하고 있는 보편적인 목적이나 목표라는 개념에 대한 보다 세속적인 믿음의 형태를 지님을 말할 것이지만, 신디정의 작업 내부에 들어 있는 자문에서처럼 우리 자신과 주변 세계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만큼은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