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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은밀한 주체적 욕망을 그리는 패션 화가, 전현경

성일권 / 문화평론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화가 전현경의 그림에는 멋진 옷을 입은 화려한 젊은 여성들이 등장한다. 마치 패션디자이너가 한땀 두땀 손바느질한 의상 작품을 자신이 점지한 모델에게 입히는 것처럼, 전현경은 섬세한 붓 터치로 재구성한 자신의 의상 작품으로 그림 속 모델을 감싼다. 그림에도 패션처럼 오뜨 꾸뛰르가 있다면 전현경의 작품이 그러할 것이다. 섬세하면서도 때로는 거침없는 붓의 터치로, 재탄생한 모델은 마치 금세라도 캔버스를 찢고 걸어 나올 듯 생동감 있어 보인다. 그의 그림에 나오는 여성들의 얼굴은 살짝 현실을 비켜 간 듯, 초현실적(또는 탈 현실적)이며 몽환적이다. 뭔가 욕망하는 강렬한 눈빛과 당당한 자태가 인상적이다. 굽이 높은 빨간 하이힐을 신은 젊은 여성이 화려한 오뜨 꾸뛰르 패션에 고급 핸드백을 맨 채 정면을 응시하는 시선은 은밀함을 훔쳐보는 필자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 왠지 짜릿한 황홀감을 느끼게 한다.

 

바람이 불면 나비의 날개짓처럼 나풀거릴 것 같은 화사한 의상을 입고서 바닥에 누운 모델의 도도한 눈빛은 그리스 로마신화 속의 아름다운 정령인 님프(Nymphs)의 치명적 매혹을 연상시킨다. 조금도 주저함이나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관람객을 응시하는 모델의 형형한 눈빛에 나 자신도 모르게 빨려든다. 화가가 감정을 불어넣은 마법의 스토리는 모델을 마녀의 시샘과 질투를 자극하는 신데렐라와 백설공주로 만들기도 하고, 모델의 은은한 표정과 손짓을 한참 들여다보면 마녀의 마법에 취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관람객들은 그림 속 여성의 깊고 짙은 시선에서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치명적 비밀을 해부하려 하지만, 그럴수록 여성은 비밀스러운 미로에 숨어든다. 아름다움에 반하면서도 그걸 곧대로 인정하지 않고, 왜 아름답냐고 따지려는 행위는 위선적이다. 그림 속 모델과 패션은 아름답지만, 전현경은 사실 눈에 띄는 아름다움보다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더 추구한다.

 

그의 그림을 보는 이들은 그가 화폭에 은밀하게 설정한 미로에 갇혀 한참을 돌고 돌아서야 팜므파탈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깨닫는다.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보이는 작은 아름다움’을 잘 그려야 한다. 전현경은 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지만, 화폭의 어떠한 언저리도 허투루 남기지 않는다. 이는 붓의 선을 중시하는 중국 고전주의적인 인물화 기법을 따르면서도 정형화된 틀이 없는 현대미술의 화법을 혼합해 작가만의 유니크한 작업이 작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매혹적인 눈빛의 인물들과 현란한 의상, 뭔가 비밀 열쇠가 들어있을 가방과 핸드백, 꿈틀거리는 고양이와 강아지, 숨 쉬는 듯한 꽃과 식물, 비밀스러운 거울과 옷장, 옷깃을 끌어당기는 듯한 멋진 현대 건물, 마녀가 살 것 같은 오래된 성에 대한 화가의 붓 터치는 대단히 치밀하고 묘사적이어서 우리가 어른이 된 후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동화 속 이야기를 소환해낸다. 어렸을 적부터 내 마음속의 연인이었으나 지금까지 보지 못한 백설공주, 신데렐라와의 만남은 ‘어른 동화’의 은밀한 즐거움을 안겨 준다.

 

300호나 되는 대형 캔버스에서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은 10여 명의 젊은 여성들이 멋진 옷을 입고, 명품 핸드백을 걸치고서 날씬한 각선미를 과시하는 모습은 너무나 세부적이어서 디테일의 아름다움을 안겨주지만, 정작 화가가 의도하는 바는 그저 ‘보이는 아름다움’이 전부가 아니다. 욕망을 가감 없이 표출하는 젊은 여성의 패션 의상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관람객들이 갖는 부르주아적 소유의 욕망, 그리면서도 그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치명적 반전(反轉)인가?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했고, 중국 광저우대학에서 유화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여성주의에 기반한 패션 그림을 작업했지만, 흔히 말하는 미디어적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그의 말마따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뭇 여성들처럼 상처 많았던 여성으로서 당당한 주체로서의 여성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그에게 있어 패션은 단순히 여성의 신체를 감싸는 의복이 아니라, 심리와 욕망을 표출하는 도구이자 상징이다. 작가가 화폭에 담은 패션은 때로는 화려하고 우아하며, 또 때로는 본능적이고 원초적이며, 전투적이기까지 하다. 작가가 선택한 그림 속 공간은 생생하고, 입체적이다. 이는 그림 속 모델이 단순히 그려지는 종속적인 모델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주체적인 주인공임을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무엇보다도 당당한 시선으로 도발적인 자태를 보인다. 세속적 명품은 그저 여성들의 원색적 욕망을 받쳐주는 소모품에 불과하다. 작가의 작품에서 기하학적인 형태나 문양이 현대적인 감각으로 도드라지게 표현된 것은 인간의 다변적 욕망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가는 “젊은 시절 패션 회사에서 디스플레이 디자이너로 일한 경험과 패션을 평소에 사랑하는 마음이 패션을 그리는 화가로 이끌었다”라면서 “끊임없이 변하는 패션 유행 속에 숨어있는 여성의 은밀한 심리와 욕망을 묘사하고 싶다”라고 말한다.

 

화가는 작업실에 반려견을 꼭 끼고 다닌다. 청력을 잃고 다리를 절뚝이는 늙은 반려견에 대한 안타까움 탓인지 그는 요즘 강아지와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에게도 많은 관심을 둔다. 강아지와 고양이가 멋진 패션 의상을 입은 채 핸드백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그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그가 얼마나 동물을 사랑하는지 짐작된다.

 

화가의 작품들을 감상하다가 한가지 궁금증이 생겨 물어보았다.

“왜 남자는 안 그려요? 반려동물에도 관심을 가지시는데….”

“글쎄요. 아직은 남자를 그리고 싶지 않네요. 여성과 반려동물에게 당당한 주체성과 해방감을 부여하고 싶은걸요.”

 

작가의 작품세계는 삶의 여정을 반영한다.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했고, 중국에서 전통적인 고전주의 인물화를 공부했고, 프랑스 인상파들의 패션 그림을 연구한 화가의 이력이 지금처럼 입체적이고, 독보적이며 개성 강한 여성 패션이라는 미술 세계를 구축하지 않았나 싶다. 모두가 화가의 작품세계에 숨겨진 매혹스러운 미로를 찾아 나서보길 기대한다..

 

성일권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의 발행인,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출판이사, 평론집 <소사이어티 없는 카페>, <비판 인문학 120년사>, <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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