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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용오름 (Tornado)

 

 이 작품은 최근에 나의 작품 중 가장 아끼는 추상 작품으로 9월 말 전시까지 업로드 하지 않을 계획이었는데 어제, 오늘 역대급 태풍 <힌남노>가 전국을 강타하는 와중이라 미리 올린다.벌집처럼 복잡하면서도 간결한, 황금빛 불기둥을 그려놓고 용오름이란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생각되어 제목을 그리 정하였다. 물론 용오름이나 토네이도는 동적인 구성으로 회오리 치듯 그려져야 하겠지만 이 장르는 세세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구상의 세계가 아니므로 대단히 단순하고 심플한 수직 처리로 마무리 하였다.작품이란 1차적으로 작가가 스스로 만족하고 좋아야 한다.내가 긴가민가하고 찜찜한 구석이 보이는데 어느 누가 공감하겠는가 말이다. 여기서 밝힐 수는 없지만 나는 혹시 어느 누가 전시장에서 이 그림값을 물어올 경우, 단 한 푼도 깎아주지 말라고 전시관계자에게 말할 것이다. 안 팔려도 전혀 아쉽지 않을 것 같은 나름대로의 자신감 때문이다. 창작을 전문으로 하는 화가에게도 그 수많은 그림이 더 그런 것은 아니다. 애착이란 대단히 선별적인 것이다.

Lakeside night view (호반의 야경)

 지난번 전시 막바지에 전시 예정 목록에 없었음에도 급히 끼워 넣었던 작품이다.전시 오픈 하루 전에 완성했던, 누구 말처럼 잉크도 안 말랐던 그림이었다. 그만큼 애착이 갔던 그림인데 사실 이런 추상화가 아닌 풍경화로서의 야경을 누구보다 많이 그려본 사람이다 보니 예전에 야경 작업을 하던 추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을 수도 있다. 정작 야경이나 겨울의 설경 등이 아름다운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눈앞의 실체를 상당 부분 생략하거나 감추어서 여백의 미를 한껏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눈이나 어둠이 눈앞의 실체를 상당 부분 가려주기 때문인데 바로 이 부분이 화면 구성에 있어서 대단히 함축적인 여백의 공간을 만들어 주기에 아름다움을 더 크게 부각시킨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은 그런 고즈넉한 풍경화는 아니지만, 추상 작업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잊혀진 계절(Forgotten seasons)


 보드 위 한지 황동 오브제이 작품은 근자에 들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의 하나로 남았다.약 1달 전에 완성한 작품으로 ‘잊혀진 계절’이란 대중가요의 제목과 흡사한 이 추상 작품은 절정의 가을의 서정 속으로 내 자신이 함몰하는 듯한 분위기에 잠시나마 혼을 빼앗기기도 했던 작품이다. 원래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시월의 마지막 밤에 이 작품을 업로드할 심산이었지만 너무 신파조의 창극 같아 애당초의 계획을 무시해 버렸다.그림은 그 구성과 주제에 따라 작품의 크기가 작아야 오히려 어울리는 그림이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이 그림은 25호 정도가 가장 앙증맞은 크기로 생각된다. 최근에 주변인들 중, 100호 미만의 그림은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식의 발언에 나는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 썩 동조하기가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나도 대작을 많이 하고 막상 전시장에서 DP를 하다보면 100호 정도의 크기도 너무 초라하게 보여 며칠 전에는 200~300호 크기의 대형 캔버스를 여러 개 주문하기도 했지만 그림의 크기와 질적 평가는 전혀 별개라는 뜻이다.

 아무튼 자신이 구성하고 일구어나가는 밭과 같은 창작의 과정은 그림의 크기와 상관없이 일관되게 자신의 영육을 갈아 넣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영혼과 육체란 인간에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 내에 마쳐야 하는 ‘프로세스’의 책무이자 과업이기도 하다. 이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 농익은 감빛 밭이랑에서 이른 봄부터 가꾸어온 경작물을 그윽이 내려다보는 감회란 이런 것일까? 이 또한 찰나처럼 지나가는 잊혀진 계절이 되겠지만...

 

 새벽의 숲길 (Forest road at dawn)

 새벽이슬이나 물안개는 건강에 안 좋다고도 하고 이른 새벽 동이 터기 전에 숲길을 걷는 것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고 하였다. 그리 일찍 산보를 나가거나 조깅이나 하이킹을 즐겨하지 않는 나로서는 해당 사항이 없기는 하지만 상상만으로도 새벽의 숲길은 대단히 청량감이 있고 청아한 자연의 기운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곧 햇볕을 받아들이기 직전의 숲길은 한 뜸, 한 뜸 수를 놓듯 옮겨가는 발자국마저도 얼마나 신선감이 있을까? 그게 전부다.

이 추상 작품처럼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숲에서 만난 낯선 두 갈래의 길목 앞에 서면 그것이 마치 인생 여정처럼 한없이 평탄한 길로 접어들 수도 있지만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험로를 만날 수도 있지 않던가? 아직도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새벽에 만난 두 갈래의 길은 바로 우리 인생의 축소판이다. 인간으로서는 예측불가능한 미지의 세계와 맞닥트린 것이다. 그래서 이럴 때 종종 사용하는 고사성어가 운칠기삼(運七技三)인데 이는 운이 7할이고 기가 3할이다. 즉 운이 기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로 사람이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성패는 운에 달려있는 것이지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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