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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브유, 최소리
김종근 (미술평론가)


나는 지금 최소리를 말하려 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를 정의할 수 있을까? 나는 그를 정의할 수 없다. 꼭 그가 소리를 내는 음악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모든 작품이 모두 그의 신들린 듯한 음악을 통해서 탄생되기 때문이다. 한번 그의 퍼포먼스를 본 사람들은 저 허공을 가로 지르는 몸짓과 그의 연주를, 그의 땀방울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느냐고 전율하며 그를 향해 우리들 앞에 오래 서 있기를 기도하며 "I love You 최소리~!를 외쳐 된다.
백두산이란 록 그룹의 드러머로 시작, 음악가로 활동하던 그가 미술작품을 들고 나타났다. 오래전 토포하우스에서 개인전을 한 후 한동안 침묵하는 듯했다. 그러던 타악기의 솔리스트 최소리가 느닷없이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수백 점의 작품을 들고 금보성 아트센터 4개 층의 전관을 채우는 초유의 작업량으로 말이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면서 그는 스스로를 끝까지 화가로 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는 천생 소리꾼의 예술가이다. 왜냐하면 최소리의 두드림, 그 울림의 예술은 영혼을 부르는 못 짓이며, 소리에 대한 갈망이며 소리에 대한 무한한 구도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소리를 본다` 바로 `見音의 경지`로 들어서기를 모든 이가 언제나 자처한다. 그의 타악의 예술은 그래서 우리 들로서는 신기하기도 또 낯설기도, 때론 가슴 뭉클하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그의 두들김으로 풀어낸 수백 여 점의 작품들을 앞에 두고 질문한다. 이것들이 과연 어떠한 예술일까 ? 예술이라면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또한 음악과 미술은 어떤 관계성을 지니는 것일까?
무엇보다 그의 작업은 타악으로 철판 위에 또는 종이 위에 스티로폼 보드 판 위에서 태어난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그려지기 보다는 두드려서 만들어낸 소리의 울림이자 흔적들이다. 그러기에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더러는 혼합된 색채들의 향연은 일종의 퍼포먼스이며 행위예술에 포함된다. 그리고 그 위에 그 흔적들을 그는 그대로 두거나 색채를 입히고 스크래치를 내며 완성한다. 때로는 거친 발걸음처럼 씩씩하게 때로는 거룩하게 조용하며 격렬한 외침처럼 격정적이다.
이 모든 움직임 가운데 아주 분명한 사실은 소리에서 출발하여 순수한 예술적 제스처에 의해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 행위들은 마치 마르셀 듀상이 화장실의 변기를 전시장에 놓았을 때처럼 논란의 거리도 있을 것이다. 허나 그러한 이슈는 이미 현대미술사에서는 고전이고 정확하게는 100년 전의 일이다. 그래서 그가 두들겨 패고 찍고 끄집어낸 궤적은 행위의 산물로서 충분히 미술적이다.
 
일찍이 전위적인 예술가 피카비아는 ‘음악은 바로 미술’이라고 명명하고 세련미 넘치는 작품을 제작했을 것이다. 이처럼 음악과 미술이 만나는 접점은 백남준의 비디오에서 마르셀 뒤샹 이후 예술의 경계를 파괴하는 아방가르드의 새로운 물결, 즉 플럭서스에서도 발견된다.
음악과 미술의 새로운 만남의 결정체인 비디오 아트에서처럼 최소리는 소리가 미술이 되는 새로운 예술 형식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 것과 비교하면 몬드리안이 뉴욕 맨해튼에서 본 재즈를 인상 깊게 느끼고 “부기우기” 라는 연작을 그렸다는 사실은 더 이상 미술에서 새롭지 않다. 명확한 것은 리듬과 멜로디는 사람의 심금을 움직여주는 묘약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최소리의 예술적 출발도 음악이 추상미술로 변해가는 행위와 과정을 모두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다다이즘적이며 혁명적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에는 그들만의 특유한 소리가 있다. 나는 그 소리들을 내 가슴에 담아 삶의 교감을 통하여 새로운 소리를 연주하고 끊임없이 탐구할 것이다. 이 앨범은 지난 수년 동안 생활하면서 내가 보고 듣고 많은 물체와의 접촉을 통해 살아있는 생명력과 무한한 힘을 느끼면서 작업한 소리들이다. “최소리의 이 자전적 고백은 그의 소리가 어디까지 펼쳐져 있는가를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가 음악에 드럼을 치듯이 리듬에 맞춰 철판을 향해 내리치는 모든 행위는 예술의 표현형식을 완전히 해체한 전위적인 형태의 새로운 창작 행위이다. 마치 플럭서스 운동처럼 다이내믹한 요소를 철판 위에 각인 시키는 행위는 전통적 미학에서의 조형미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미술까지 한 번에 제시한 것처럼 독자적이다. 즉 최소리는 2차원에서 논의되던 관념적 세계를 평면으로 표현하면서 구호에 그쳤던 음악과 미술의 만남을 현실적인 3차원 공간 안에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해석된다.
어쩌면 조셉보이스가 “예술에 있어 청각적 요소와 소리의 조각적 특성은 나에게 항상 핵심적인 것” 들이라고 주장했던 것처럼 작품의 제작에서 소리가 그것을 실재적으로 초월하는데 기여하는 그런 작업 태도로 평가된다.
피에르 쉐퍼가 “모든 소리는 이벤트의 이미지”라고 규정한 것처럼 최소리의 이미지의 회화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한다. 이것도 그림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비디오 아티스트인 백남준 작가의 인터뷰를 인용하고 싶다. 그는 3차원의 문제를 “나는 촉각적인 그림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것은 1966년부터 시작되어 3년 후에야 천천히 이루어졌다. 시각적 악보는 잉크로 그려진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아무것도 보지 않고 단지 만지면서 음향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것을 찢어 작품이 사라지면 완성된다. 종이 표면 위에는 인체 크기의 빈 원만 남는데 그곳에서 환영은 끝없이 펼쳐지며 공간과 소리를 보여준다. 기념비적인 그림 위에 남겨진 녹음된 나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그렇다. 최소리의 작업은 백남준의 고뇌와 표현과 창조성과 상당히 많이 닮아 있다.

문자가 언어의 표현이듯 언어 또한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언어는 근원적이다. 음악 역시 무엇인가를 묘사한다. 이제 남은 것은 최소리의 회화에서의 조화가 화면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가이다. 그러나 최소리는 황홀한 형식의 퍼포먼스 예술에서 그것은 그 자체로 중요할 뿐 모두가 가치 있고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기에 시각적인 것과 음향적인 것의 상호작용이 모두 활발하게 이루어져 이 수백 점의 다양한 형상과 다양한 컬러의 작품들이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거의 즉흥적인 교향곡처럼 태어난 것들이다. 어떤 작품들은 절대적인 예측할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을 화폭에서 발견한다면 바로 그러한 근거 때문이다.

최소리의 소리는 이제 들을 수 있는 것이기보다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특징을 갖게 되었다. 시각적인 것은 자유와 이성의 공간을 남겨 놓듯 최소리는 드럼이 표현할 수 있는 한계를 넘기 위해 전통적인 국악으로 눈을 돌리면서 자유스러움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소리의 세계를 초월 혹은 뛰어 넘어서기 위해 미술로 전이한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드럼이 낼 수 있는 소리의 한계, 울림과 소리라는 화두를 잡고 눈에 보이는 듯 살아있는 소리를 만들고자 하는 열정. 그것이 최소리의 마지막으로 도달한 예술정신이다.

 

산속에서 움막을 짓고, 수도를 하듯 소리를 탐구하는 모습과 수년 전부터 소음성 난청 질환을 앓고 있지만 "완전히 청력을 잃는다면 오히려 상상의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편안하다"고 하는 최소리의 여유와 넉넉함. 나는 그것이 참 마음에 든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려고 이례적으로 서울 근교 작업실을 세 번씩이나 방문해야 했다. 워낙 수시로 작품을 제작하고 며칠씩 밤을 새우며 작업을 하는 그의 스타일의 놀라움 때문이다. 나는 그의 공연과 소리를 다시 한번 돌려보며 그에 관한 글을 마무리한다.
그의 이런 엄청난 작품들 앞에서 나는 비로소 아 소리도 이렇게 탁월한 예술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마찬가지로 이태리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루치오 폰타나가 무한한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서 공간의 개념을 창조하고, 화폭을 자르고 찢으면서 유니크한 평면을 창조해 낸 것처럼 최소리는 소리로 예술을 창조한 보기 드문 화가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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