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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달표의 회화

하나의 물방울에서, 얼룩에서 파생된 세계

고충환(미술평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낡은 벽면에 난 얼룩에서 광활한 평원을, 물밀려오는 홍수를, 그리고 진군하는 군대와 전투를 본다. 심지어 어렴풋한 성당의 종소리를 듣기조차 한다. 시각적 이미지를 넘어 청각적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를 우연한 얼룩에서 보고 듣는다. 돌이켜보면 현대미술에 앞서 공감각을 예시해주는 이 일화는 물론 화가의 상상력의 소산이며 인문학적 소양의 결과일 것이다. 누구든 똑같은 얼룩에서 화가와 똑같은 것을 보고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저마다의 인문학적 소양이 틀리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얼룩이 그저 얼룩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다. 얼룩은 그것을 대면하는 사람과 만나지는 순간 의미를 덧입게 된다. 자연현상 내지는 물리적 현상으로부터 의미론적 대상으로 그 정체성이 옮겨지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마르셀 프루스트는 마들렌 과자를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입안에서 나는 소리와 향이 불현듯 유년 시절로 데려다주는 경험에 대해서 전하고 있다. 그리고 시인 백석은 이국의 여관에서 문풍지(벽면이었던가)를 보면서 고향을 떠올린다. 문풍지가 그리움의 대상을 되불러오는 관념의 스크린이 되어준 것이다. 심지어는 외관상 의미와는 무관해 보이는 잭슨 폴록의 그림에서 북미대륙의 원초적 풍경을 보는 사람도 있다. 자연현상 내지는 물리적 현상에서 의미를 캐내는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상력이 더 뛰어나다거나 유별난 인문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주체와 만나지는 순간 필연적으로 의미를 담보하게 된다. 주체에게 세계는 거대한 텍스트며 책이다. 그에게 무의미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무의미조차 의미의 대상으로서만 의미를 가진다. 무의미한 것은 다만 그렇게 보일 뿐, 아직 그 의미가 캐내지지 못한 것일 뿐, 의미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의미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형식에 대한 모더니즘의 기획은 논리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나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나아가 비록 가능할 때조차 그 기획이, 그 실현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가 의심스럽다.

 

 인간은 의미론적 동물이다. 심지어 하나의 점에서조차 세계의 기원을, 존재의 씨알을, 우주를 보고, 하다못해 기하학적 원소(모듈)를 찾아낸다. 모든 사물은 사물 자체와 의미론적 대상, 무의미와 의미 사이에 펼쳐진 의미론적 스펙트럼 위에 걸쳐있다. 때로 사물 자체의 속성에 기울어지기도 하고 더러는 의미론적 대상 쪽으로 치우치기도 하지만, 사물 자체로 환원되거나 다만 의미론적 대상(순수개념 내지는 순수관념)으로만 남겨지는 경우는 없다.

 

 외관상 자연현상 내지는 물리적 현상에 대한 반응처럼 보이는, 그리고 근래에는 상대적으로 유기체적 대상을 떠올려주는 경달표의 그림은 이처럼 사물 자체와 의미론적 대상 사이, 객관적 사물현상과 주관적 해석 사이에 주목하고 그 관계에 천착한 것으로 보인다. 의미가 배제된(혹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혹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인) 순수형식을 통해서 모더니즘의 형식논리를 강조하는 듯 하면서도, 정작 그 환원주의에 대해서만큼은 결정적이거나 엄격하지는 않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 논리를 비켜가거나 파기하거나 확장시키는 것도 같다. 이 근대적 자의식(형식논리)과 후기 근대적 자의식(의미론적 대상성) 사이, 틈새, 간극으로부터 특유의 긴장감이, 의미론적 긴장감이 유래한다. 말하자면 그의 그림은 그저 얼룩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 얼룩은 침묵하는 얼룩인가 아니면 말하는 얼룩인가, 얼룩인가 아니면 얼룩 이상인가를 묻는 문제의식의 언저리를 맴돈다.

 

 

 세계는 하나의 점으로부터 파생된다. 그리고 경달표의 그림은 하나의 물방울에서 비롯된다. 세계의 기원과 경달표의 회화의 기원. 물방울은 때로 점으로서 현상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물방울로 나타난 회화의 기원에 대한 관념은 그대로 세계의 기원에 대한 유비적 표현이기도 한 것. 경달표의 그림에는 이처럼 회화의(그리고 세계의) 기원에 대한 생각이 들어있다. 하나의 물방울에서 비롯된 그 생각은 작가의 그림을, 그림 그리기를 맴돌면서 그 시와 종과 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지배한다. 물방울 주변을 맴돌기도 하고 물방울에서 꽤나 멀리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꽤나 멀리까지 나아갔다가도 반드시 물방울로 다시 되돌려진다. 물방울에서 부풀려지고 재차 물방울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하는 과정이 자기반성적인 회귀를, 모더니즘적인 회유를 예시해준다. 그가 그린 모든 그림의 밑바닥에는 이처럼 회화의 씨알인 물방울(세계로 치면 점)이 들어있다.

 

 경달표는 언젠가 비 오는 날 유리창에 떨어진 물방울이 만들어낸 우연한 얼룩에 주목한다. 그리고 무수한 물방울을 유리판에다 떨어트려 본다. 그러면 물의 표면장력에 의해 유리판에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무늬가 그려진다. 그리고 그 중 일정한 무늬를 골라 그 모양 그대로 화면에다 옮겨 그린다. 물론 그 과정에서 형태와는 달리 물방울의 크기는 확장된다. 물방울이 그렇듯 주로 청색계열의 색조로 그려진 이 일련의 그림들은 그 과정에서 입으로 불거나 콤프레셔를 사용해 인공적인 바람을 불러일으켜 자연스런 형태를 잡아나간다. 이렇게 해서도 자연스런 형태가 잡히지 않으면 그 무늬의 가장자리를 다듬어(더듬어?) 원하는 형태를 찾아낸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물방울무늬가 화면에 옮겨진다. 그런데 그것을 물방울 그대로를 옮겨 놓은 그림, 물방울 그대로를 재현한 그림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다만 물방울에서 착상된 그림이며, 물방울과는 상관이 없는 그림이 된다. 그리고 물방울이 만든 무늬가 우연적이라고 해서 작가의 그림 역시 다소간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그림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물방울이 만든 무늬 자체는 우연적이지만, 그 우연의 계기를 만들어준 것은 작가다. 그리고 물방울의 크기가 확장되는데, 주지하다시피 크기가 달라지면 의미도(지각도 인식도 덩달아) 달라진다. 청색 또한 물방울의 자연색으로 보기는 어려운데, 자연색과 관념색은 다르다. 더욱이 유리판 위에서 볼 때와 정작 이를 화면 위에 옮겨놓고 볼 때, 물방울 혹은 물방울무늬에서 어필되는 자연스런 형상과 그 느낌은 다르다. 자연스런 형상과 느낌(더 물방울다운? 혹은 작가가 원하는?)을 찾아내기 위해서 물방울에는 없는, 혹은 물방울과는 다른 과정과 요소가 개입되거나 매개된다.

 

 해서, 작가의 그림은 물방울을 그린 그림이라기보다는 물방울에서 착상된 그림이다. 물방울의 본성을 따른 그림이라기보다는 회화적 본성을 따른 그림이다. 물방울에서 착상된 회화적 그림이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그 그림 속엔 여전히 물방울이 들어있다. 물방울다운 형태와 작가가 원하는 자연스런 형태가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합체된 형태로. 이로써 작가의 그림은, 그림 그리기는 회화적 본성과 그 프로세스에 대해서, 특히 핵심적인 부분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말하자면 하나의 사물 현상이 그림 속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그 자체 객관적인 대상이 어떻게 주관적인 개입과 매개를 허용하는 대상으로 전용되는지를, 의미 바깥에 속해져 있던 대상이 어떻게 의미와 해석을 덧입게 되는지를 재구성하고 역추적할 수 있게 해준다. 이렇듯 외관상 의미로부터 자유로운 객관적 사물현상(물방울무늬가 만들어내는 우연적인 효과)에 착상된 것이나 이를 화면에 옮기는 과정에서 유래한 회화적 본성에 대한 태도야말로 작가로 하여금 모더니스트로 자리매김하게 해주는 근거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물방울은 비정형이다.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다. 더욱이 그것을 그림으로 옮겨 놓으면 물방울보다는 차라리 얼룩에 가까워진다. 이 비정형의 얼룩들은 그대로 온갖 형태와 의미에 노출된다. 점과 같은 기하학적 원소를 떠올리는가 하면, 가녀린 이음새를 매개로 하나로 연결된 형태가 발아하는 싹을 떠올리게 하고, 긴 형태가 오이나 가지 같은 식물을 닮았고, 과일이나 만개한 꽃, 별 모양, 그리고 관 모양을 닮아있다. 심지어는 추상적인 서체나 근작에서는 나비와 같은 곤충마저도. 한마디로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으니, 사실상 가능한 온갖 형태가 다 들어있는 것이다.

 

 이처럼 비정형의 형태로부터 정형의 형태를, 추상적 형태로부터 구상적 형태를 찾아내는 것은 물론 암시 때문에 가능해진다. 실제로도 이런 암시테스트가 인지 내지는 지각 심리학에서 실험이나 치유를 위한 한 과정으로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에서 엿볼 수 있듯, 암시는 저마다 다른 주체의 인문학적 소양에 의해 지지된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똑같은 물방울무늬에서, 그리고 이를 그림으로 옮겨놓은 작가의 그림에서 각자 다른 형태를 암시받고 다른 의미를 떠올릴 수가 있게 된다. 해서, 그 이미지는 물방울처럼도 보이고, 그저 무의미한 비정형의 얼룩처럼도 보이고, 점처럼도 보이고, 꽃처럼도 보이고, 과일처럼도 보인다. 자연현상이나 물리적 현상처럼도 보이고, 기하학적 패턴처럼도 보이고, 유기체적 형태처럼도 보인다. 사실상 모든 가능한 형태와 의미에 대해 열려져 있는 일종의 비결정체계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으로 보이든 보이는 것 자체(감각적 현실)보다는 이를 통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낸 비결정체계를 작가가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그것을 무엇으로 보든 하나같이 물방울이 그 기저에 깔려져 있다는 점이며, 그 물방울무늬로부터 파생된 형태들이고 의미들이라는 점이며, 이를 통해 작가가 열려진(함축적이고 암시적인) 형태, 열려진 의미를 실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이렇듯 열려진 체계 자체는 예술의 본질이며 그 유비적 표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작가의 그림은, 그림 그리기는 예술의 정의에도 맞닿아있고, 이에 대해 자신만의 문법으로 반응한 경우로도 볼 수 있겠다.

 

 

 물에서, 물방울에서, 얼룩으로부터 시작돼 유기적이고 추상적인 형태로, 식물성의 형태로, 동물성의 형태로, 무의미한 형태와 유의미한 형태로 마구 확장돼가는 작가의 그림은 일정한 펄 성분을 함유하고 있는 청색, 적색, 연녹색, 회색조의 색감들로 나타난 단색조의 화면이 단순하고 절제된, 그러면서도 함축적이고 암시적인 형태와 더불어 장식적인 인상을 준다. 그 형태가 일종의 미니멀리즘(후기 미니멀리즘 혹은 유기적 미니멀리즘?)으로 귀착된다면, 의미를 함축한 무의미한 형태(적어도 외관상 무의미해 보이는 형태)를 실험하거나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선 개념주의의 맥락에서도 읽힌다.

 

 물방울이 그려낸 우연한 무늬처럼 보이는, 그저 비정형의 얼룩처럼 보이는, 사과처럼 보이고 꽃처럼 보이고 나비처럼 보이는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사실은 그 이면에 현대미술의 문제의식들을 계승하고 있고, 예술의 본질을 건드리고 있고, 이 모두를 버무려 자신만의 고유한 문법으로 추슬러내고 있다. 흐르는 물에 정해진 형태와 결정적인 의미가 있을 수가 없다. 비록 물방울에서 비롯된 작가의 그림이 물처럼 흐르는 경우와는 다르지만, 그 형태나 의미가 열려져 있다는 점에선 크게 다르지가 않다. 작가는 혹 물방울을 통해서 물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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